[단독] ‘학폭 확정’ 될 때까지 놈들과 ‘공포의 11주’세계일보 기사제공: 2025-07-23 19:14:32

‘2차 피해’에 우는 청소년들
해마다 학교 폭력 발생 증가세
또래에 폭행 당해도 학급분리만
매일 가해자 대면… 불안 시달려
교육청 단위 처리… 심의기간 지연
기피 업무에 담당 인력까지 부족
지난해에 최장 16주 걸린 사례도

인천의 한 중학교에 다니는 강모(15)군에게 지난봄은 끔찍했다.
학교 화장실에서 같은 학년 4명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부모를 비하하는 말까지 들은 강군은 일주일 뒤에도 학교 복도에서 폭행당했다.
공황장애까지 겪어야 했던 강군의 부모는 학교에 이를 알리고 분리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학교 측은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가 진행 중이라 학급 분리 외 조처는 어렵다”고 했다.

강군 어머니 황모씨는 “심의위 결과가 곧 나올 것으로 생각해서 ‘알겠다’고 했지만, 조치가 결정된 것은 그로부터 11주 뒤였다”며 “심의위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학교에서 매일 가해자 얼굴을 마주보고, 심지어 다른 동급생을 시켜 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해마다 학교폭력 처리 건수가 늘고 있지만, 시·도 교육청이 개최하는 학폭위 사건 처리가 늦어지면서 피해 학생 보호가 어렵다는 지적이다.
사실상 학교 차원의 조치가 어려운 구조에서 학폭위 결정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게 문제다.
공정성과 전문성을 높인다는 취지에서 도입된 교육청 단위의 학폭위 제도가 ‘2차 피해’를 방치한다는 비판마저 나온다.


23일 학교폭력예방법에 따르면 학교폭력 가해 학생에 대한 긴급 출석 정지는 학폭위 개최 전까지 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학폭위가 열리기 전 학교 차원에서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을 분리시킬 수 있지만, 유명무실한 제도라는 것이 일선 학교 반응이다.
학교 차원에서 긴급 출석 정지를 했다가 자칫 가해 학생 측으로부터 ‘학습권 침해’라고 비판받거나, 학교가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는 압박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 소재 중학교 교사 박모씨는 “가해, 피해 상황이 명백해 보여도 선생님들은 ‘가해 관련 학생’, ‘피해 관련 학생’이라고 명명해야 할 정도”라며 “교사의 기계적 중립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교육적 개입은 어불성설”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데도, 교사들은 ‘비밀 유지’를 어기면 처벌받기 때문에 사안에 대해 철저히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했다.


학폭위 처리 기간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서울시의회 교육위원장 황철규 의원이 11개 교육지원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학폭 평균 심의 소요 기간은 2022년 6.6주, 2023년 8.1주, 2024년 6.3주였다.
지난해 평균 심의 소요 기간이 가장 길었던 지원청은 강서양천으로 9주가 소요됐고, 강동송파지원청에선 심의에 16주나 걸린 사례도 있었다.
한 학기가 약 5개월인데 사실상 학기 내내 학폭 사안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사건 처리가 늦어지면서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 모두에게 교육적·회복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학교폭력 전문 노윤호 변호사는 “사건이 빨리 진행돼야 가해학생이 반성하고 처벌의 교육적 효과가 있는데, 시간은 지날 대로 다 지나고 기억조차 흐릿해진다”고 우려했다.


처리 지연엔 학교 폭력을 둘러싼 쟁점이 첨예해진 측면이 있지만, 학폭위를 여는 교육청 단위에서 처리해야 하는 사건이 늘어나는 것도 원인이다.
지난해 1학기 서울교육청이 처리한 초·중·고 학폭 심의 건수는 1238건인데 담당 인력은 68명뿐이었다.
같은 기간 처리 건수가 199건으로 가장 많았던 강남서초지원청 인력은 장학사와 주무관을 합쳐 6명에 불과했다.
서울 한 교육지원청에서 5년 근무한 박종민 변호사는 “학폭은 기피 업무라 인력 충원도 어렵고 자주 바뀌어 전문성이 쌓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학폭위 제도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다른 피해 학생 학부모는 “가해자와 피해자 심의위가 따로 열리는데, 심의위원 명단부터 회의록까지 모두 비공개”라고 했다.
황철규 서울시의원은 “학폭위 소위원회 구성과 운영을 규정하는 법적 근거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투명하고 공정하게 학폭위의 체질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운영 안내’에 따르면 학교 폭력 사안을 심의하는 소위원회는 5∼1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야 하지만, 이를 규정하는 법 조항이 없어 최근 3년 평균 출석 인원은 4.3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소진영 기자 so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