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0대 공적연기금 운용사 중 하나인 네덜란드연금자산운용(APG)의 신흥국 담당 대표가 국내 자본시장에 대해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여전히 신뢰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시장 구조부터 상장기업의 지배구조, 정부 정책과 금융당국의 규제까지 모두 신뢰가 부족하다는 진단이다.
박유경 APG 신흥국주식부문 대표는 최근 아시아경제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이같이 지적했다.
APG는 세계 최대 규모 연기금 중 하나인 네덜란드공적연금의 자산운용사다.
지난해 말 기준 운용자산(AUM) 규모는 6160억유로(약 986조원)에 달한다.
박 대표는 신흥국 시장 주식 투자를 총괄하기 전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책임투자 및 지배구조 관련 업무를 맡았다.
지난해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만나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선 방안 등을 논하기도 했다.
상법 개정안 통과가 다가온 만큼 박 대표에게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배경과 해소 기대감에 대해 물었다.
그 역시 한국 자본시장이 대선 이후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평가했지만, 아직 기형적인 부분이 남아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거의 지난 70년 동안 바뀐 적이 없는 주식시장의 핵심 작동원리를 바꾸고 진정한 자본주의로 나아가려는 순간"이라며 "상법 개정안은 이걸 바꾸는 계기라 굉장히 상징적이면서도 무척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진단했다.
박 대표는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본 한국 자본시장의 문제를 세 가지 신뢰 부족으로 꼽았다.
먼저, 시장 작동 원리에 대한 신뢰 부족이다.
박 대표는 "재벌, 지배주주가 가진 0.5%가 소액주주들이 가진 수십 퍼센트 지분보다 더 크고 강력하다는 건 자본시장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당장 재벌이나 지배주주를 해체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그동안 기업을 이끈 원리를 시장의 압력을 통해 바꾸는 일이라 쉽지 않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상장 기업에 대한 신뢰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경영진이 모든 주주를 위해 일하고, 이사회 같은 거버넌스가 잘 작동해 상장 기업의 기본은 할 것이라는 신뢰가 부족하다"며 "모든 주주를 위하는 거버넌스가 부족하고, 법과 규제에 최대한 맞춰 작동한다는 믿음 자체가 약하다"고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꼽은 것은 규제당국에 대한 신뢰 부족이다.
박 대표는 "공정한 심판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정부에 따라 지배구조 정책이 바뀐다"라며 "기본 작동 원리와 규제를 진정성, 일관성 있게 추진하지 못하니까 해외 투자자들이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법 개정안을 계기로 진짜 자본주의 선진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 지수 편입 같은 표면적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시장 체질 개선이라는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에 집착하는 것은 소득이 적은데도 '샤넬백'을 들겠다고 고집부리는 것과 같다"며 "실질적인 편입 효과를 차치하고, 일단 자본시장 작동 원리를 제대로 바로 잡는다면 매력적인 시장이 되면서 자연스레 해외 자본이 밀려들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국내 사모펀드 시장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 대표는 "본인의 아이디어로 사업을 일으킨 사람이 사모펀드 등의 자본을 받아들이고, 자본의 논리와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성장하는게 기업의 생애주기고 자본주의의 흐름"이라며 "국내에선 아직 사모펀드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한탕주의에 빠진 경우가 꽤 있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시장에서는 정상적인 가치평가 대신, '경영권 프리미엄'이라는 왜곡된 개념이 생겨났고, 이는 결국 상장 시장 전반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기업의 가치는 창업 이후 자본 유치와 성장, 인수합병(M&A)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평가돼야 한다"며 "하지만 경영권 프리미엄이 개입되면서 가치 판단 기준이 흔들리고, 자본주의의 본질까지 훼손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민우 기자 letzw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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