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부터 반도체·관세 파고까지...현대차는 어떻게 버텼나아시아경제 기사제공: 2025-07-22 07:00:00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올 초 신년 행사에서 강조한 말이다.
지난해 현대차그룹은 역대 최대 실적 신기록을 세웠다.
바로 다음 해 전략과 비전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정 회장이 꺼내든 키워드는 아이러니하게도 '위기'였다.
2018년 수석부회장에 오른 이후 그의 신년 메시지 핵심을 관통하는 주제는 줄곧 '변화와 성장'이었다.
그룹의 성장 동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순간 그가 위기를 떠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위기 극복을 통해 성장한 현대차그룹의 DNA가 그에게도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 회장의 예상대로 현대차그룹은 올해 글로벌 관세 격랑 속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세계 시장을 상대로 관세 전쟁을 선포하면서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 대통령이 적극적인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관세를 인상하겠다는 서한을 각국 정부에 발송하면서 압박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기존의 관세 협상 및 외교와는 결이 다른 트럼프식 행보에 각국 정부는 물론 기업까지도 대응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혼란에 빠졌다.
특히 미국의 관세 부과 타깃이 결국 무역적자 규모가 큰 한국과 일본으로 좁혀질 것이란 의견에 무게가 실리면서, 현대차그룹에 대한 실적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는 전망도 나온다.

겉에서 보면 현대차그룹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최근 만나본 내부 관계자들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현대차그룹은 과거 수차례 위기 돌파 경험 속에서 스스로 위기에 강한 조직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조직 전반에 배어 있다.
위기를 다시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까지 엿보인다.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정부가 자동차 산업에 25% 품목 관세를 부과하는 상황은 세계 각국에 공장을 둔 모든 글로벌 완성차 업체에 동일한 조건이 될 것"이라며 "쉽지는 않겠지만 현대차그룹은 충분히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강조했다.

2020년대 들어 현대차그룹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글로벌 악재를 맞게 된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사상 초유의 '팬데믹(Pandemic·감염병 주기적 유행)'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글로벌 완성차 업계의 공급망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시작은 중국이었다.
2020년 1월 중국에 코로나19가 먼저 퍼지면서 중국 부품 공장이 생산 차질을 빚었다.
현대차·기아는 보통 수작업이 필요한 '와이어링 하네스'라는 전선 뭉치를 중국에서 들여오고 있었는데, 부품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서 국내 완성차 공장도 멈춰 섰다.
현대차는 동남아 등 대체 생산지를 물색하고 생산 물량을 줄이는 대신 라인 가동은 이어가는 '공피치'를 활용해 생산 차질을 최소화하려 애썼다.

중국발 사태가 진정될 때쯤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됐다.
감염병이 미국과 유럽으로 빠르게 번져나가면서 각국 정부는 국가적인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경을 봉쇄했다.
필수 사업장 외 영업장의 전면 폐쇄 지침을 내리면서 사회 전체가 얼어붙었다.
글로벌 자동차 공장도 가동률이 뚝 떨어졌다.
2020년 국가별 자동차 생산 대수를 살펴보면, 미국(-19%)과 유럽(-28%), 인도(-25%), 일본(-16%), 멕시코(-20%) 등 대부분 국가의 연간 생산 대수가 전년 대비 20% 내외 감소했다.
반면 한국은 11%로 중국을 제외하면 주요 생산국 중 가장 적은 감소율을 보였다.

한국 자동차 공장이 가동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가적인 방역 시스템도 한몫했다.
정부는 드라이브 스루 선별 진료소, 진단 키트 개발 등 신속한 진단 시스템을 만들었고 재난 문자 발송과 확진자 동선 추적·공개로 추가 감염 경로를 차단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효했던 방역 시스템은 '사회적인 연대주의'였다.
개개인의 희생과 불편을 감수한 일반 시민들의 노력이 일상을 멈추지 않고 돌아가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 기간 현대차그룹이 가동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구성원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세계 공장이 문을 닫고 생산 라인을 멈췄을 때, 한국에 본진을 둔 현대차·기아 공장은 나홀로 가동으로 생산량을 늘리며 앞서나갔다.

전 세계 시장에서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을 보인 내수도 버팀목이 됐다.
대중교통을 기피하는 사람이 늘면서 자가용 수요가 늘었고, 적기 공급이 가능했던 현대차·기아의 내수 시장 판매는 전년 대비 6%가량 늘었다.
당시를 회고한 현대차그룹 부품사 전 대표는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공장에서 수천 명을 먹이고 재우며 공장을 돌린 적도 있다"며 "지금 보면 상식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엔 정말 절박했다"고 말했다.

코로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현대차그룹은 2021년 반도체 공급 대란이라는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생산·판매 감소를 겪은 글로벌 완성차 업계는 다음 해 반도체 주문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시장 수요가 빠르게 반등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공급 대란이 일어났다.
차종에 따라 소비자는 차를 계약하고도 1년 넘게 출고를 기다려야 했다.

반도체 업계 입장에서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메인 시장이 아니다.
가전제품이나 IT·통신기기용 반도체가 물량이 훨씬 크고 수익성도 좋다.
2024년 기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차량용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 내외로 추산된다.
따라서 반도체 업체가 차량용 반도체만을 위해서 생산을 갑자기 늘리는 일은 사실상 어렵다.
이 같은 구조 때문에 2021년 반도체 공급 대란은 자동차 업계를 중심으로 촉발됐다.
하지만 반도체 공급 대란을 버텨낸 이후 현대차그룹은 글로벌 판매 순위 3위로 도약하게 된다.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점유율을 늘린 현대차만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현대차는 기존 관행의 틀을 깬 구매 네트워크 방식을 업계 최초로 구축했다.
과거엔 완성차 업체가 차량용 반도체 업체나 파운드리와 직접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다.
반도체 업체들은 통상 주문을 낸 1·2차 부품사와 협의하는 방식으로 거래해왔다.
공급 위기가 닥치자 현대차는 반도체 구매 전략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부품사를 거치지 않고 완성차 본사가 직접 대응에 나섰다.

반도체 유통 구조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반도체 회사가 대리점으로 직접 내보내거나 글로벌 스마트폰 및 가전기기 업체에 공급하는 물량, 자동차 부품사에 공급하는 물량 등 다양한 유통 채널 속에서 남는 자투리 물량을 뒤져서 확보해야만 했다.
기존에 부품사를 통해 연락할 때 보이지 않던 빈틈들이 반도체 업체와 직접 소통하자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반도체 회사의 입장에서도 완성차의 생산계획을 한발 빠르게 알 수 있어 물량 대응이나 예측이 가능해졌고 양사 간의 신뢰 관계도 두터워졌다.
완성차 중심의 반도체 구매 네트워크 구축은 글로벌 시장에서 현대차그룹이 가장 빠르게 반도체 공급 부족을 해소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이다.
의사소통이나 결정의 막힌 부분을 찾아 개선하려는 능동적 자세, 기존의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해결 중심 사고가 핵심이었다.

두 번째 비결은 구매와 연구·품질·생산 본부 간의 유기적인 협업이다.
부품 공급선 다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서 간 협업 체계가 중요하다.
구매본부는 대체 가능한 부품의 거래선을 최대한 확보하고 가격, 납기 일정, 공급 안정성 등 기초 요건을 면밀히 점검한다.
이후 대체 부품 리스트를 연구소에 전달하면 연구소는 각 부품의 기술적 타당성과 기존 제품과 호환성을 평가한다.
이 과정에서 설계 변경 여부를 판단하고 필요한 경우 기능 시험·내구성 테스트도 진행한다.
기술 검토가 완료되면 품질본부가 심사를 이어받는다.
품질본부는 새로운 부품이 법규·성능 기준을 충족하는지 확인하고 불량률, 내구성, 양산성 확보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최종적으로는 생산본부가 실제 생산 공정에 대체 부품을 적용해 본다.
이때 생산성, 공정 안정성, 납기 대응력 등을 확인하고 공정 전환 시 예상되는 리스크를 점검한다.
이 모든 과정이 짧으면 1년, 길면 2~3년까지도 걸린다.
현대차그룹은 평소부터 대체 거래선을 꾸준히 확보해두고 특정 부품사에 문제가 생기면 신속하게 대체 부품을 투입할 수 있는 폭넓은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다.

마지막 비결은 현대차그룹의 '맨파워(인적 역량)'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전략적 접근을 실행하는 것이 바로 현장 직원들이다.
현장에서 이 전략을 수행할 때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관계자들은 '책임감에서 나온 간절함'이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반도체 공급 대란 당시 현대차 구매본부 담당자들은 주요 반도체 업체가 몰려 있는 유럽으로 출장을 끊임없이 갔다.
당시는 코로나로 유럽 전역이 봉쇄된 시기였기에 현지에 간다해도 담당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확신도 없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호텔에서 머문 채 화상으로만 만나거나 담당자의 집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적도 많았다.
현지에 머물며 담당자들을 하나둘씩 만나고 시장 분위기와 움직임을 파악하면서 상황은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의사결정권자가 누구인지, 어떤 아이템에 남는 물량이 있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게 됐고 그제야 비로소 조금씩 물량이 돌기 시작했다.

당시 사정에 정통한 현대차 고위 관계자는 "당시 반도체 TF 직원들은 어려운 코로나 시국에도 유럽 출장을 마다하지 않았다"며 "한국에서도 시차를 맞춰야 했기에 밤샘 근무도 잦았다.
반도체를 확보하지 못하면 전체 생산라인이 멈춰설 수 있다는 절박감 속에서 오직 책임감과 사명감 하나로 1년 가까운 시간을 버텨낸 것"이라고 회고했다.
퍼즐 조각처럼 하나하나 어렵게 확보한 반도체 물량은 결국 현대차그룹의 공장 가동을 지켜낸 결정적 열쇠가 됐다.
각 부문의 총력 대응 끝에 현대차그룹은 2021년, 역대 최고 성적인 글로벌 완성차 업계 3위에 오르게 된다.
코로나 팬데믹과 반도체 대란이라는 연이은 위기는 결과적으로 현대차그룹의 위기 대응 역량을 실전에서 검증받는 계기가 됐다.

코로나 위기 이전에도 현대차그룹은 위기를 극복하며 성장한 경험이 있다.
1997년은 외환 위기로 내수 수요가 반토막 나고 공장 가동률이 급감하던 시기였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어려움을 겪던 현대차는 오히려 공격적인 인수합병(M&A) 전략을 취한다.
쓰러져 가는 기아자동차를 인수해 차량 플랫폼 및 부품 공용화를 꾀하고 규모의 경제를 조성하며 원가를 낮추는 전략을 썼다.
결과적으로 보면 현대차의 기아 인수는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 다른 위기 극복 사례는 2008년 금융위기 때다.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 수요가 급감하며 완성차 업체들이 감산에 나섰지만, 현대차그룹은 오히려 생산을 늘리며 글로벌 판매 확대를 강조했다.
모두가 움츠리던 시기, 정몽구 명예회장은 점유율을 선제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리더십이 빛난 순간이었다.
특히 이때 현대차는 미국 시장 공략에 공을 들였다.
'10년·10만마일' 보증이나 실직자의 차량을 되사주는 '어슈어런스 프로그램'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며 공격적으로 점유율을 늘려갔다.
미국 점유율 확대 덕분에 현대차그룹은 2008년 글로벌 판매 순위 5위의 반열에 올랐고, 2009년 상반기에는 포드를 제치고 업계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완성차 업체가 주저앉던 그해, 현대차그룹은 오히려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위기의 파고 속에서 선제적으로 방향을 바꾸고 움직이는 자만이 생존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