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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기표와 기의라는 두 가지 요소로 언어를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기표는 말소리나 글자처럼 우리가 사용하고 인식하는 언어적 형태이고, 기의는 그 기표가 가리키는 개념이나 의미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나무라는 글자에서 '나무'라는 문자와 음성은 기표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진짜 나무, 즉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구체적인 이미지나 개념을 기의라고 부르죠.
하지만 우리가 나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듣는 개인이 떠올리는 나무의 모습은 조금씩 다를 겁니다. 어떤 사람은 키가 큰 소나무를, 또 다른 사람은 벚나무나 사과나무를 떠올릴 겁니다. 이처럼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항상 일정한 간극이 존재합니다. 언어는 현실을 완벽하게 옮겨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기의를 온전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묘사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반지하에 햇빛이 비쳤다'라는 문장보다 '반지하 창문을 통해 사포처럼 빳빳한 햇살이 들어왔다'라는 문장이 그를 보는 사람에게 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렇게 기의에 가까워지도록 정교하게 다듬은 기표를 '적확(的確)'하다고 부릅니다. 적확한 표현은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나 관념을 상대에게 오차 없이 전달하려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결국 언어란 기표와 기의 사이의 끊임없는 조율과 해석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표를 통해 기의를 전달하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언제나 오해와 해석의 여지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문학은 여러 언어적 장치들을 동원하며 기표와 기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고 합니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는 시(詩)에서 가장 두드러집니다. 시는 본질적으로 기의에 가 닿으려는 기표들의 집합이지만, 동시에 그 기의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기표의 예술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이나 세계의 어떤 진실을 언어로 표현하려 하지만, 그 언어는 언제나 해석의 여지를 남기죠. 독자는 시인의 의도와는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의 기표는 기의에 도달하려 노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의미는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독자의 해석에 따라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곤 합니다.
시인은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 안에서 최대한 적확하고 밀도 높은 기표를 선택하여 자신의 세계를 전달하려 합니다. 시의 아름다움은 이 '미끄러짐'에 있습니다. 기표가 기의에 완전히 가 닿지 못하기에, 시는 무한한 해석과 상상의 공간을 열어줍니다.
이수명 시인의 시론에서, 시인은 '창밖에 모래바람이 분다'는 문장을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모래바람은 기의를 뜻합니다. 창을 열면 들이닥친 모래바람으로 시와 시인 사이의 거리가 좁아져 시가 온전한 기의를 품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창밖에 모래바람이 분다는 문장만으로도 시가 성립한다는 말입니다. 강을 돌아다니는 물고기들을 다른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다가가면 흩어지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그 물고기들은 우리가 가만히 있을 때만 다가옵니다. 우리가 그 물고기들을 포착하는 방법은 사진을 찍는 일밖에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 사진은 시가 되겠죠.
간단한 문제입니다. 이번에는 기의를 늑대에 비유해 보죠. 우리가 거대한 늑대를 마주쳐서 무서웠다고요. 우리가 겁에 질린 채로 본 늑대는 현실의 늑대와 다른 존재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안에 남은 늑대의 이미지를 기표에, 현실을 돌아다니고 있을 늑대를 기의에 빗대 볼 수 있겠죠. 현실의 늑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늑대를 최대한 자세하게 묘사해야 합니다. 묘사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늑대는 생동감을 얻어, 끝내 우리의 상상에서 걸어 나가 하나의 생명이 되겠죠.
결국 시란, 그리고 모든 예술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거리에서 피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술가는 그 틈새를 최대한 좁히려 노력하지만, 독자는 그 틈새에서 자신만의 의미와 감정을 발견하게 되죠. 그래서 우리는 시를 읽으며 언어가 닿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 빈틈을 채워나가는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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